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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예술이야기

두보의 친필 유묵 시 '등루', 이게 왜 한국에 있어요?

by brilliantkorean 2024. 5. 15.

목차

    두보의 친필 유묵 시 '등루', 이게 왜 한국에 있어요?

    중국 당나라 유명 시인

    두보(712~770)의 '등루'라는

    시 유묵이 한국에서 최근 발견됨

     

    고배도자기과학감정원에서 안목감정,

    과학감정 등을 거친 결과 진품으로 판정

    현존하는 두보의 글씨는

    이 유묵이 발견되기 전까지

    전세계 어느 박물관에도 없었다.

    아마 거의 다 중국 문화대혁명 때

    불타서 없어진걸로 추정된다.

    이 등루라는 시는 명확하게

    갑신년 춘모(744년)에

    지어졌다고 적혀있으며

    이때는 두보가 이백을 만나는 시기라

    많은 시를 짓고 있을 때였다.

    결과적으로 이 유묵이 나타남으로 인해

    역사적인 추측이 실제로 고증되었다.

    이 유묵에 나타나는 인장은 총 44개이며,

    이 중 청나라 황제인

    '건륭의 보물'이라 칭하는 인장만 11개로

    그 당시에도 최고의 보물로

    여겨진 것으로 확인된다.

     

    중국 : 뭐임??? 그게 왜 한국에 있음???

    한국 : 뭐임??? 이게 왜 한국에 있음???

    '유묵(遺墨)' 뜻은?

    '유묵(遺墨)'이란 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을 뜻하는 말입니다.

    '남길 유(遺)'자와 '먹 묵(墨)'자의 조합이며 말 그대로 사망자가 생전 먹물을 이용해 쓰거나 그린 모든 일체의 작품을 일컫는 말입니다.

    사람이 죽기 전 가족 및 가까운 친지에게 자신의 재산 및 유품의 분배 문제, 또는 개인의 사적인 문제에 대하여 작성한 문서를 유서(遺書), 생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유언(遺言), 사망자가 소지하고 있다가 남긴 물건은 유품(遺品)이라고 합니다.

    두보의 유묵, '등루' 시의 발견과 함께 다시 주목받는 황제, 건륭제

    청나라 6대 황제인 건륭제
청나라 리즈시절인 강건성세(강희-옹정-건륭)의 마지막 타자 이자
성공적인 다수의 정복전쟁, 탄탄한 내치 등 명군으로 칭송받 는 인물인데
중국 미술사 전공자들은 이 인간 면상만 보면 이를 빠득빠득 감
    건륭제는 스스로 육각형 꽉 찬 인물이라고 생각해서
예술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음.
자신이 수집 할 수 있는 그림은 모두 수집하고
시상이 떠오르면 바로 시를 써서 생전 4만편이 넘는 시를 쓸 정도
그러나
    6꽉은 본인 착각이었고
후대에는 미친 반달리스트 홍력(본명)이라고 개쌍욕을 먹는다
일단 알아야 할 건
예전 중국에선 명시, 명화 등을 가지게 되면
"내가 소유함"
이라면서 인장(도장) 찍는게 국룰이었음
더해서 자신있으면 보고 떠오른 시상으로 시를 한 구절 귀퉁 이에 남기기도 했고
(인장 범벅된 중국 명화 - 작화추색도)
    문제는
技神 矣乎
건륭제 인장은 황제 아니랄까봐 미친놈처럼 크다
더군다나 보통은 양심적으로 가생이에 찍거나 하는데
(왕)
()
건륭제는 그런거 모름
황제답게 담담하게 중간에 크게 꽝 찍어버림
    심지어 건륭제는 도장도 많아서
보통 저런 도장이 진짜 많아봐야 150~200개인데
이인간은 중복 포함하면 천개가 넘음
三希堂
古
(건륭제 인장의 극히 일부)
    인장 찍는건 그때 누구나 그랬으니까 그럴 수 있다고 쳐도
홍력이가 욕을 바가지로 먹는 이유는 또 있는데
위에서 언급했듯 이인간은 시뮬 4만편 이상 썼음
그말인즉슨
그림 보고
"캬 이쁘다"
하고 도장 꽝 찍고
"이걸 보니 이런 시가 떠오르는구나"
하고 빈 곳에 자작시를 남겼다는 거임
(도장+시
(도장+시)
    더군다나 잘 쓴 시면 몰라도
건륭제 시는 진짜 허접스레기인데
그걸 여백에다가 끄적였다는거임
단적으로 20세기 유명 중국 문학평론가 전종서는 건륭제 시 를 보고
"청고종(건륭제)은 또 문장으로 시를 지었으며 허사(虛辭)를 무분별하게 사용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구토(嘔吐)를 일으키 게 한다"
라고 혹평을 남겼음
이게 그냥 중국 고관의 이야기여도 어지러운데
이인간은 당시 동양 최강국의 천자였다는게 문제
    "아 조맹부(유명 화가) 그림 갖고싶다"
하면 바로 진상되고
"아 내가 떠오른 시가 있는데"
하고 읊으면 문무백관이 기립박수 치는 인간이라....
顔真卿
書から情が つたわってくる
祭姪分稿
気だけじゃなく
顔真卿の一族 人が戦乱で 亡くなったて
三生六大を
安禄山の乱 壮烈な戦死をとげに
で憲前门
红べつら・・・
男のための 弔文の草橋
天不传动福秀
乾隆帝のハンコ
乾隆帝のハンコ
皇帝
乾隆帝の文章!また
の書 マジすごい 一が決で ってたのに そのとき
退びけてて
すかさず
玄宗ディスを 放りこむ
あいつか・・・
スッ・・・ (涼のひびき)
(일본에서도 유명한 반달리스트 건륭제)
    심지어 본인 시를 첨삭해주고, 가끔 대필까지 해 준 심덕잠이 라는 천재 시인이 있었는데
(심덕잠)
이 사람은 죽기 전에 남긴 시집에 자기가 첨삭하고 대필한 건 륭제의 시를 수록했음
미친 건륭제는 나중에 그거 알고 야마돌아서 심덕잠 부관참시 해버림
죄명은 반역
    - 당시 조선에선 사신이 저 황제가 쓴 시 배껴오면 돌려보면서 더럽 게 못쓴다고 조롱하는게 일상이었다고 함
- 건륭제가 자존심 스크래치 낸 심덕잠을 부관참시한 표면적 이유는 생전에 서술기라는 시인 시집 서문을 써줬기 때문
그게 문제가 된 이유는 아래와 같음
"서술기가 죽자 그의 아들은 부친이 남긴 시를 정리하여 일주루시집 (一柱樓詩集)」을 출간했다.
시간이 지나 어느 날, 서술기의 손자가 채가수라는 이와 토지 문제로 심하게 다투었다.
분노한 채가수는 '일주루시집』이 청나라를 비방한 내용으로 가득하 다고 관가에 고발했다. 서씨 집안을 멸족시킬 의도였다.
"일주루시집』에는 이런 시구가 있었다.
1) "맑은 바람은 글자를 모르는데도 어찌 책장을 어지럽히는가"(淸風 不識字何故亂翻書)
2) "술을 마시면서 영명한 천자를 홀연히 만나니 잠시 술병을 옆자리 에 치운다네"(舉杯忽見明天子且把壺兒拋邊)
3) '내일 아침 새처럼 칠칠 날아 단번에 천궁(天宮)으로 가고 싶다네' (明朝期振關一舉去清都)
1)은 서술기가 독서를 하고 있는데 자꾸 바람이 불어 책장이 넘어가 는 모습을 재치있게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건륭제는 '청풍불식자(淸 風不識字)'는 청나라 사람들은 글자도 모르는 야만족이라고 비난한 것으로 생각했다.
2)는 술을 마시다가 만난 황제에 대한 일편단심을 표현했지만, 건륭 제는 '명천자(明天子)'는 명나라 황제이며 '호아(壺兒)'는 '호아(胡兒, 오랑캐)'와 발음이 같으므로, 서술기가 망한 명나라 군주를 흠모하면 서 자신을 오랑캐로 비난했다고 분노했다.
3)은 사대부들이 속세를 떠나 이상향으로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표 현했다. 하지만 건륭제는 이것을 언젠가는 명조(明朝)가 부활하여 일 거에 청조의 도성을 쓸어버리겠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건륭제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미친놈임 그냥
    업적이라고는 재벌가 유일한 상속자로 태어난게 전부인 SNS중독자 회장같은 황제님 ㅠㅠ

    두보의 유목이 대학원생들에게 가지는 의미.Ssul

    두보는 시성(詩聖)이라고도 불리는 중국의 시인으로 시선(詩仙) 이백 (이태백) 과 더불어 당나라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일차적으로 이 유묵은 중국, 대만, 한국, 일본은 물론 세계 어느 박물관에도 없는 두보의 유묵이라는 데 의미가 있지만, 문학사에도 영향을 미치는 바가 존재한다.

    두보의 시 등루(登樓) 내용

    花近高樓傷客心(화근고루상객심),萬方多難此登臨(만방다난차등임)。
    錦江春色來天地(금강춘색래천지),玉壘浮雲變古今(옥루부운변고금)。
    北極朝庭終不改(북극조정종불개),西山寇盜莫相侵(서산구도막상침)。
    可憐後主還祠廟(가련후주환사묘),日暮聊爲梁父吟(일모료위양부음)。
     
    <원문출처> 登樓/ 作者:杜甫 唐 / 全唐詩·卷228
    本作品收錄於:《唐詩三百首》,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높은 누각 가까이 꽃이 피었으나 나그네 상심하여,
    만방의 많은 어려움 이곳에 올라 내려보네.
    금강의 춘색은 온 천지 가득한데,
    옥루의 뜬 구름은 예나 지금 변함 없네.
    북극성과 같은 조정은 바꾸어질리 없으니,
    서산 오랑캐들아 쳐들어 오지마라.
    가련한 후주를 사당에 모심이(제갈공명) 덕이려니,
    날 저물어 양부음(용사의 노래)으로 마음 달랜다.

    원래 이 시는 764년 지어진 시로 알려져 있었고, 萬方多難(만방다난, 온 세상이 어지러운 때)은 西山寇盜(서산구도, 서산의 도적들)과 연결되어 토번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시기가 어떤 시기였나, 광덕(廣德) 원년(元年:763) 당이 안녹산의 대란으로 혼란에 빠지자 토번의 티쏭데짼(ཁྲོ་སྲོང་ལྡེ་བརྩན, 적송덕찬) 이 20만 대군을 몰아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점령하고 광덕지변으로 광무왕(廣武王) 이승굉(李承宏)을 황제로 세운 시기이다.

    진짜 당나라가 어지러운 시기였고, 이 때 두보의 나이가 53세로 파직을 경험하고 좌천되어 성도를 떠나 기주에 다다랐을 때였다.

    그래서 후주환사묘(후주 유선이 아직도 사당에 있으니)와 양보음(제갈량이 남양 융중에 은거할 때 부르던 노래 이름)을 엮어 뜻을 이루지 못한 자신의 불우함을 나타낸 시라고도 해석했었다.

    두보의 유묵 발견으로 인해 다시 쓰여지는 역사적 사실

    하지만 띠용!

    알고보니 이 시는 갑신년 춘모 (744년) 에 지어진 시였고 이 시기는 광덕지변이 일어나기 전이다.

    두보의 나이가 33살로, 24살에 본 시험에 떨어져 놀러 다니던 시기이고, 오히려 당나라의 장군 고선지가 달해부를 평정하고 돌궐 제2 제국이 멸망하는 시점이다.

    그러니까 뭐다? 대학원생들 눈에 불이 난다!

    그리고 이 시기가 바로 두보와 이백이 만나서 활발하게 교류하던 시기인데, 원래 양보음(梁父吟) 에는 종류가 두 가지 있었다.

    "지금 제갈량과 이백이 지은 두 가지의 〈양보음〉이 전해지는데, 제갈량은 춘추 시대 제(齊)나라 재상 안영(晏嬰)이 공손첩(公孫捷), 진개강(陳開疆), 고야자(顧冶子) 세 명의 용사(勇士)에게 복숭아 두 개를 가지고 서로 다투게 하여 끝내 모두 ■■하게 만들었던 안타까운 일을 서술하였고, 이백은 강태공(姜太公) 여상(呂尙)과 역생(酈生)을 거론하며 지사(志士)가 포부를 실현하지 못하는 비분강개한 심정을 토로하였다."

    그리고 이백이 지은 양보음 (梁父吟) 이 천보 3년, 바로 744년에 지어진 시로 추정된다.

    그러니까 그냥 이백이랑 만나서 놀다가 "아 나는 왜 벼슬을 못하지? ㅅㅂ 열받네! " 하고 지은 시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유묵 하나로 시와 사람에 대한 해석이 이렇게 달라질 수도 있다는게 참...대학원생들...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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