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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예술이야기

16세기 조선시대 할아버지의 육아일기, 양아록(養兒錄)

by brilliantkorean 2024. 2. 12.

목차

    16세기 조선시대 할아버지의 육아일기, 양아록(養兒錄)

    양아록(養兒錄)의 뜻은 '아이를 키우면서 쓴 기록'이라는 의미이며, 16세기 조선시대의 선비 묵재(默齋)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이 쓴 책으로 한국사에 현존하는 유일한 육아일기입니다.

    을사년(1545) 9월 6일, 큰형의 아들 이휘(李煇)가 역모죄로 거론되자 승지 이문건은 사직하고 관직에서 물러났지만, 결국 이휘의 처형과 함께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연좌제에 걸려 유배지인 경상북도 성주(星州)로 귀양가게 됩니다.

    그는 22년에 걸친 유배 생활 도중 16년 분량의 '묵재일기(默齋日記)'를 남겼습니다.

    그중에서도 58세에 얻은 귀한 손자 숙길(叔吉)을 직접 양육하며 쓴 양아록은 현재까지 학계에 보고된 자료 중에서 조선시대 양반 집안의 자손교육 체험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현존 최고(最古)의 육아일기이며, 진귀한 기록문화유산으로 인정되어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7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다음은 KBS 역사추적, 조선 선비의 육아일기 양아록 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KBS 역사추적, 조선 선비의 육아일기 양아록

    조선시대 할아버지의 육아일기, 양아록(養兒錄)

    한국 역사상 가장 오래된 육아일기이자 조선시대를 통틀어 유일하게 남아있는 육아에 관련된 서적, 양아록입니다.

    양아록은 이문건이 자신의 손주를 직접 키우고 돌보며 세세하게 기록한 육아일기입니다.

    손주가 기억하지 못할 유년시절을 기록하고 체험하며 자신을 아끼는 할아버지의 마음 또한 헤아려 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시작된 일기라고 합니다.

    KBS 역사추적, 조선 선비의 육아일기 양아록

    다음은 손자가 16세가 될 때 까지 계속해서 쓰여진 양아록의 첫 문장입니다.

    '아들이 자식을 얻어 가풍(家風, 한 집안에 대대로 이어 오는 풍습)이 이어졌다.
    조상들의 영혼이 지하에서 많은 도움을 주셔서 뒷일들이 모두 잘될 것 같다.
    오늘 저 어린 손자를 기쁘게 바라보며, 노년의 내가 아이 크는 모습을 지켜보겠다.
    귀양살이 쓸쓸하던 터에 좋은 일이 펼쳐져 나 혼자 술을 따르며 경사스러운 일을 축하한다.'

    천연두로 다른 자식을 모두 잃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둘째 아들이 어렵게 가진 귀한 손주

    천연두로 다른 자식을 모두 잃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둘째 아들이 어렵게 가진 귀한 손주

    이문건의 자식들은 대부분 천연두 등의 병을 얻어 일찍 죽었습니다.

    유일하게 살아남아 어른이 된 아들은 둘째 아들인 이온(李熅)뿐이었는데, 그 또한 어릴 적 앓은 천연두의 후유증으로 굼뜨고 이해력이 느렸습니다.

    역적으로 몰려 무너진 가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묵재 이문건이 하나 남은 아들 이온에게 건 희망이 컸지만, 마음처럼 교육에 따라와주지 못하는 이온에게 실망한 나머지 학대에 가까운 구타를 저지르고는 스스로 반성하기도 합니다.

    그런 와중에 둘째 아들 부부가 어렵게 손자를 낳았으니 바로 이문건의 손주 숙길입니다.

    당시 아들이 몸이 좋지 않은데다 친척 대부분이 을사사화의 여파로 죽거나 귀양을 간 상태였기에 손주 숙길은 성주 이씨 문중의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에 손주에 대한 애정이 참 남달랐다고 전해집니다.

    비단 이문건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대부분 할아버지가 손주나 손녀를 직접 가르치는 격대 교육을 했다고 합니다.

    천연두로 다른 자식을 모두 잃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둘째 아들이 어렵게 가진 귀한 손주

    그림을 살펴보면 회갑연 때에도 어른들이 많은 복잡한 잔치 속에서 아이들이 술래잡기하거나 잔치에 함부로 올라와도 다들 귀여워하고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입니다.

    옛 어른들이 그리 엄하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새참 그림에서도 아버지가 자신이 먹을 밥을 자식에게 떠주곤 했습니다.

    참으로 흐뭇하고 온화한 표정이네요.

    손자의 성장을 세세하게 기록한 할아버지

    손자의 성장을 세세하게 기록한 할아버지
    손자의 성장을 세세하게 기록한 할아버지

    이문건이 쓴 양아록을 살펴보면 아들의 건강이 좋지 못한 상태에서 태어난 첫 손자에게 숙길이라는 아명을 지어줍니다.

    예로부터 아기의 이름을 너무 멋지고 예쁘게 지으면 신이 질투하여 일찍 하늘로 데려간다는 속설이 전해집니다.

    아명을 개똥이나 말똥이 등 촌스럽거나 이상한 이름으로 짓는 이유입니다.

    천연두(마마)에 걸려 시름하는 아이를 보고 고통스러워 하는 할아버지 이문건

    천연두(마마)에 걸려 시름하는 아이를 보고 고통스러워 하는 할아버지 이문건
    천연두(마마)에 걸려 시름하는 아이를 보고 고통스러워 하는 할아버지 이문건

    돌을 지난 이숙길은 학질(3세), 안질(4세), 일사병(5세), 경기(5세), 마마(6세), 귓병(9세), 홍역(10세) 등 다양한 질병을 앓았으며 그때마다 할아버지 이문건은 크게 근심 걱정하며 이를 세세하게 기록했습니다.

    특히 이 시기 천연두(마마)에 걸릴 경우 생존확률은 30~40% 내외였다고 합니다.

    사경을 헤메던 손자를 위해 집에 무당을 불러서 굿까지 했다고 전해집니다.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며 깊은 사랑과 귀여움을 받았던 손자 숙길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며 깊은 사랑과 귀여움을 받았던 손자 숙길

    현재로 따지자면 유치원 들어갈 때쯤의 나이부터 어머니가 쓰던 공간인 안채에서 생활하던 아가를 사랑채로 옮겨 할아버지 본인이 직접 훈육하고 돌보게 됩니다.

    방을 처음 사랑채로 옮긴 첫 날을 이문건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잠도 같이자고, 밥도 같이먹고, 공부도 시켰다.'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며 깊은 사랑과 귀여움을 받았던 손자 숙길

    손자 이숙길과 할아버지 이문건은 끈끈한 유대관계를 가졌습니다.

    할아버지 품 안에서 잠들고, 문 밖까지 마중나와 기다리는 등 예쁘고 귀여운 짓을 많이 하여 깊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팔불출이었던 할아버지 이문건, 책 읽는 손자의 모습을 대견해하다

    팔불출이었던 할아버지 이문건, 책 읽는 손자의 모습을 대견해하다

    할아버지 이문건은 손주가 책 읽는 모습만 봐도 흐뭇해 했습니다.

    어른들이 아이를 키우다 보면 흔히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에 과장된 의미를 부여하곤 합니다.

    현대의 부모들도 육아 도중 '우리 아이는 혹시 천재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품곤 합니다.

    양아록을 살펴보면 이문건도 그런 류의 글을 간간히 썼다고 합니다.

    잘못을 체벌하고 우는 모습을 보며 함께 가슴아파하다

    잘못을 체벌하고 우는 모습을 보며 함께 가슴아파하다
    잘못을 체벌하고 우는 모습을 보며 함께 가슴아파하다

    손자가 틀린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할아버지한테 아니라고 대들자 할아버지가 손자를 체벌합니다.

    손자가 우는 모습을 보고 할아버지도 마음이 아파서 슬퍼했다고 합니다.

    성주 이씨 집안의 하나 남은 희망이니 혹여나 잘못된 길로 빠질까봐 걱정도 많이하였고 다소 엄격하게 훈육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할아버지 본인이 직접 술을 가르쳤다 하는데, 아직 13세의 어린 손자가 친구랑 어울려서 과음을 일삼고 술에 취해 잠드는 모습을 보며 술을 자제하라고 권고하고 우는 마음으로 기록한다고 쓰여있습니다.

    14세에 새롭게 이름을 지어주고, 16세에 상투를 틀어 어른으로 대접하다

    이숙길이 열네 살이 되던 해 할아버지 이문건은 손주에게 아명인 숙길을 버리게 하고 새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새 이름은 수봉(守封), 자는 경무(景茂)였습니다.

    이숙길은 '이수봉'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열여섯이 된 1566년(명종 21) 정월 15일 정식으로 관례(冠禮)를 치르고 상투를 틀었습니다.

    이후 할아버지 이문건은 일기에도 손자를 '수봉'이라고 기록하였으며 아이가 아닌 어른으로 대접하였습니다.

    14세에 새롭게 이름을 지어주고, 16세에 상투를 틀어 어른으로 대접하다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귀하고 길러온 이씨 집안의 유일한 희망, 이수봉(숙길)은 임진왜란 당시 우정침(禹廷琛), 윤우(尹佑)와 함께 의병으로 전쟁에서 크게 활약했습니다.

    이에 조정에서 상을 내리자 "마땅한 도리를 다했을 뿐"이라며 사양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KBS 역사추적, 조선 선비의 육아일기 양아록 원본 영상

    KBS 역사추적 – 조선 선비의 육아일기, 양아록

    만화로 보는 양아록

    만화로 보는 양아록
    그림 : 이혁, 출처 : 프리미엄조선

    이문건의 엄한 교육과 사랑 속에서 자라난 숙길과 남매들의 이야기

    이숙길에게는 이숙희(李淑禧), 이숙복(李淑福), 이숙녀(李淑女) 세 명의 누이가 있었습니다.

    이숙길과 마찬가지로 태어나자마자 붙여 준 아명으로, 이중 큰 누나 이숙희는 이문건의 첫 손자로 묵재일기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특히 막내 손녀인 이숙녀(1555~1608)는 자라서 동래부사 송상현(1551~1592)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녀의 남편 송상현 부사는 임진왜란 때 동래성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하다 끝내 순절하여 높은 충절로 역사 속에 길이 이름이 남는 사람이 되었으며, 그녀의 두 아들 인급과 효급도 벼슬길에 들었습니다.

    이문건의 엄한 교육과 사랑 속에서 자라난 숙길과 남매들의 이야기이문건의 엄한 교육과 사랑 속에서 자라난 숙길과 남매들의 이야기
    동래부 순절도(東萊府殉節圖), 대한민국 보물 제392호, 변박(卞璞 1742~?)(좌),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동에 위치한 충렬공 송상현 장군 동상(우) - 출처 : wikipedia

    성주이씨(星州李氏) 이숙녀의 남편 송상현 부사의 일화

    1592년(선조 25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그 다음날(음력 4월 14일) 부산진성이 함락되고, 이어 동래에 쳐들어온 왜병이 남문 밖에 목패(木牌)를 세우고 '전즉전의 비전즉가도(戰則戰矣 非戰則假道 :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비켜라)'라 하자 동래 부사 송상현은 '전사이 가도난(戰死易 假道難 :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비키기는 어렵다)'이라고 대꾸하여 결사 항전합니다.

    이미 왜란을 짐작하여 각종 함정과 마름쇠를 설치하고 방비를 단단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약 3만 병력에 맞서서 관민 약 4,000명으로 대항하였지만 7배가 넘는 병력의 열세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성이 함락당합니다.

    성주이씨(星州李氏) 이숙녀의 남편 송상현 부사의 일화성주이씨(星州李氏) 이숙녀의 남편 송상현 부사의 일화
    송상현 영정(정부표준영정 85호) 2002년 권오창 화백 제작, 충청북도 청주시 충렬사 소장(좌), 동래 부사 송상현과 부산진 전투의 정발 장군 등 93위의 위패를 봉안한 부산 동래 충렬사,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충렬대로 345(우)

    송상현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게 되자 부채에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뒤 조복을 갈아입고 왕이 있는 조정의 뱡향인 북향으로 사배를 올리고 항전을 이어가다 전사했습니다.

    일본군 선봉대 장수 소 요시토시와 고니시 유키나가는 비록 적수이긴 하나 그의 용기와 충절에 크게 감탄하였고, 송상현 부사를 살해한 왜병을 찾아 처형했다고 전해집니다.

    왜장들은 전투가 끝난 후 정중한 예를 갖추어 송상현의 장례를 치러주고 추모비를 세웠으며, 부하들에게 그의 충직함을 본받으라고 훈시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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